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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45)_프린트물_2025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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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8-05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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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45)

[ 제3권 제22장 2항 – 제22장 5항 ]


    성경본문: 에베소서 1:4-5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2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2항. 창세 전의 선택은 공로의 예지와 관계가 없다

  더욱 완전한 증명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귀절의(엡1:4-5) 각 부분을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 부분을 종합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선택된” 자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신자들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틀림없고 그도 곧 이렇게 언명합니다. 그러므로 “선택된”이란 말을 복음이 선포된 시대에 국한되는 것으로 그릇 해석하는 사람들은 비열한 허위로 이 말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고(엡1:4) 말함으로써 가치에 대한 고려를 전적으로 배제합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과 또 후에 아담 안에서 동등한 인간들이 될 사람들을 서로 구별할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다면, 각 사람이 그 자신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 중에서 분리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하반절)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선택의 원인을 예지라고 생각하는 과오를 반박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덕은 선택의 결과라고 바울이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고차원적인 원인을 묻는다면,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하셨으며, 이 일은 “그 기쁘신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엡1:5 상반절). 이런 말로 그는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다고 상상하는 선택의 수단을 일체 배제합니다. 영적 생활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는 다만 바울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사람들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주고자 하신 은혜를 그들이 나기 전에 그들을 위해서 각각 간직해두신 것이라는 이 한 가지 근원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3항. 선택하신 것은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었지 거룩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이 결정이 지배하는 곳에는 행위에 대한 고려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는 이 대조법을 전제하지는 않으나, 그가 다른 데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그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그리고 “우리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말에 의해서(엡1:4), 우리는 모든 의혹에서 풀린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밝혔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리란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한다면, 바울이 말하는 순서를 뒤집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우리를 택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택하신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선택받음으로 해서 거룩케 된다고 하는 생각과, 행위 때문에 선택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두 가지 생각은 서로 일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주 궤변을 사용하여, 주께서는 이미 있은 공로에 선택의 은혜를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공로에 선택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말에는 정당성이 없습니다. 신자들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선택을 받았다고 할 때에는, 동시에 그들에게 있을 거룩은 선택에서 유래했다는 뜻이 암시됩니다. 선택에서 유래한 것이 선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바울은 자기가 말한 것을 확인하는 듯이 후에 “그 기쁘신 뜻대로”(엡1:5), “그 기쁘심을 따라”(엡1:9) 라고 말합니다. “그 기쁘심을 따라”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을 내리실 때에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고려를 하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곧 부언하여,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오로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찬양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엡1:6 참조). 우리가 선택된 데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말은, 확실히 그 은혜를 값없이 주신 경우에 한해서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택하실 때에 각 사람의 행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려하신다면, 그 선택은 거저 주시는 은혜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라고(요15:16) 하신 말씀은 모든 신자들에게 전반적으로 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공로를 배제하실 뿐 아니라, 만일 그가 먼저 제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에게는 선택될 아무 이유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또 바울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한 말은(롬11:35)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앞지르시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그의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을 과거나 미래에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신다는 것이 바울이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4항. 로마서 9-11장과 유사 귀절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논법을 더욱 깊이 반복하여 더욱 자세히 전개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합니다(롬9:6). 비록 모든 사람이 상속권에 의해서 복을 받았지만 그 상속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논의는 유대 사람들이 교만하며 거짓된 자랑을 하는 데서 생겼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을 “교회”라고 주장했을 때에, 그들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자기들의 결정에 의존시키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교황주의자들은 이 거짓된 구실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언약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에는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적자의 지위에서 서자로 전락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모든 사람 위에 엄연히 있어서 그들을 지배하며, 독자적으로 양자됨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은 그의 경건 때문에 구원의 소망이 확보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의 배반 때문에 상속권이 말살된다면 바울이 그의 독자들에게는 이 비밀의 선택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전연 불합리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그 원인은 하나님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밖에서 구할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손 모두가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의 상태가 그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어 논의를 더욱 전개해 나갑니다. 두 사람이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고, 어머니의 태중에 함께 있었지만, 맏아들의 권리는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이 변경은 하나의 전조와 같은 것으로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유기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이 일의 근원과 원인을 묻는다면, 예지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덕성과 죄악에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의 피상적인 논법의 요점은, 야곱이란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을 보이셨고, 에서에게서는 무가치하다고 예견하시는 사람들은 버리신다는 것을 보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이렇게 대담한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1-13,창25:23 참조). 만일 두 형제 사이에 차이를 둠에 있어서 예지가 그에 어떤 관련을 가졌다면, 여기서 때를 말한 것은 확실히 부적당했을 것입니다.


  야곱에게 장차 있을 덕에서 오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바울은 왜 그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을 합니까? 그가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경솔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고 따라서 야곱의 경건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 있었다고 곧 대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위가 은혜를 얻게 한다면,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야곱이 나기 전에, 그가 성장한 것 같이, 이미 당연히 확정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야곱의 선택은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사도는 행위를 말함으로써 미래나 과거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고, 행위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연히 대립시킵니다. 그 한 편을 확립함으로써 다른 편을 교묘하게 부정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고려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셨는가 하는 것이고,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끝으로, “선택”과 “목적”이란 말들을 보면(롬9:11), 사람들이 보통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과는 별도로 안출해 내는 원인들이 모두 이 원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5항.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행위를 근거로 삼는 주장을 반박한다

  선택에는 행위도 관여한다고 하는 사람은 이 점들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구실을 사용할 것입니까? 이는 그들의 입장이 사도의 주장을 직접 회피하려는 것이기 때문인데 사실상 두 형제 사이의 구별은 그들이 나기 전에 확정된 것이므로, 그것이 행위에 의존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의존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주장입니다. 그들의 궤변에 조금이라도 진정한 그 무엇이 있다면 사도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자신께서 선택의 은혜를 통하여 주시기를 이미 결정하신 것 이외의 선한 것을 사람에게서 조금도 예견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선행을 그 원인 앞에 두는 어리석은 짓으로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만을 기초로 한 것이며, 이 은혜는 행위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를테면 눈앞에 그에 대한 실례를 보고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서, 아직 같은 태중에 있으며, 세상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서로 꼭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쪽은 받으시고, 다른 쪽은 버리십니다. 한 편이 나은 것은 다만 장자 상속권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무시하시고, 장자의 것을 빼앗아 아우에게 주셨습니다. 다른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획적으로 장자의 권리를 멸시하시며, 육신의 자랑거리를 일체 박탈하시는 것같이 보입니다. 이스마엘을 제외시키시고 이삭을 사랑하십니다(창21:12). 므낫세를 제쳐 놓으시고 에브라임에게 더 큰 영예를 주십니다(창4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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