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OUNCEMENT

어나운스먼트

주보

그룹성경공부

교회소식

교회소식

기독교강요강해(145)_프린트물_2025년 9월 3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9-01 21:16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46)

[ 제3권 제22장 6항 – 제22장 8항 ]


    성경본문: 요한복음 17:11-12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2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6항. 야곱이 선택된 목적은 지상의 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누가 나를 가로막고, 우리는 내세의 삶 전체에 관해서 이런 낮고도 사소한 유익들을 근거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며, 장자의 영예를 받은 사람이 곧 하늘의 기업을 받기로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고 가정합시다. 이는 심지어 바울까지도 위에서 인용된 증거들을 사용할 때, 성경을 왜곡하여 생소한 의미로 해석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도가 경솔하게 잘못 말했거나 고의로 성경의 증언들을 오용하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는 우리의 반대자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대 안에 감춰져 있었던 야곱의 영적 선택을 지상적인 표징으로 표현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부여된 장자 상속권을 내세와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무하고 어리석은 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으로 인해서 얻은 것은 각종 곤란과, 고통과 쓸쓸한 타향 생활과 많은 슬픈 일과 비통한 근심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을 위해서 그의 나라에 준비하신 영원한 영적 복을 외적인 복으로 증거하셨다고 확실히 깨달았을 때에, 바울은 서슴지 않고 그 외적인 복에서 영적 복을 증명하는 증거를 찾은 것입니다(엡1:3이하 참조). 우리는 또한 가나안 땅도 하늘나라 처소의 증표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천사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나누기로 되었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공로에서는 다르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며, 버림을 받은 에서와 구별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셨다고(롬9:15) 대답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이유를 그들 자신에게서 찾지 않으시고 자신의 긍홀에서만 취하신다고 하는 것이(롬9:16) 주의 분명한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의 구원은 오로지 주 자신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자신 안에서만 확립하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로 내려갑니까가?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 분의 긍휼만을 가리켜 주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합니까? 주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그의 긍휼 가운데 국한시키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의 관심의 일부를 우리 자신의 공로로 향하게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고 하는(롬11:2) 소수의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을 미리 아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반대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한가한 망대 위에서, 자신이 직접 하시지 않는 일을 다만 예지하실 뿐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이 말이 자주 사용되는 그러한 뜻에서입니다. 누가가 전하는 베드로의 말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이란 말이 있습니다(행2:23).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은 확실히 구경꾼이 아니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들을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벧전1:2).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로 삼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정하시는 그 은밀한 예정을(벧전1:2) 적절하게 표현합니다. “뜻”이란 말을 동의어로서 첨가할 때에 - 이 말은 보통 확고한 결심을 의미하므로 - 베드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주관하실 때에 자신의 외부로 나가시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같은 장에서 그리스도를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어린양이라고 말합니다(벧전1:19-20).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 인류의 구원이 올 것인지를 보시려고, 하늘에서 내려다 보신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의미한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미리 알려진 사람들은, 바울이 보기에는 군중 가운데 섞인 소수에 불과하고, 군중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스스로 가장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위선자들의 교만을 억제하기 위해서,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고 합니다(딤후2:19). 요약하면, 바울은 이런 말로써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후손 전체요, 또 하나는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사람들로서 사람은 볼 수 없으나 하나님이 보시는 곳에 숨겨 있는 자들입니다. 바울의 이 말이 모세의 말에서 왔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언급합니다(출33:19). 이 말씀은, 외적인 상태는 같은 선민에 관한 것이었으나 마치 그가 일반적인 선택 안에 일부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은혜가 포함되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더욱 거룩한 보화같이 여겨진다고 한 것과 또한 공통된 언약이 있다고 해서 소수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대열에서 분리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서 자신이 값없이 은혜를 나눠주시며 판단하신다는 것을 알리고자, 다만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또 원하시는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신다고 단언하십니다. 자비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거절을 당하는 일이 없이 자비가 내려집니다. 이런 때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예측하거나 그 일부를 취득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에 관하여 자기를 찬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선택과 유기의 이 근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함, 7-11항)

7항. 선택에 관한 그리스도의 증거

  이제 이 문제 전체에 대해서 최고의 심판자시요 주이신 분의 발언을 듣기로 합시다. 그는 청중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들 앞에서 하시는 말씀이 거의 다 수포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이 장애를 극복하시려고 외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6:37).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6:39).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증과 보호를 받게 되는 발단은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여기서 논의의 방향을 돌려 믿음으로 자발적으로 복종한 자들만이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된다고 항의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무수한 군중이 배반하여 전세계를 뒤흔들지라도 선택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이 하늘보다도 더 견고할 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선택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독생자를 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것이 본래 그런 것이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낯선 자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무도 명백하여서, 어떤 궤변의 구름으로도 덮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6:44-45). 만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선택은 전반적인 것이 되겠지만, 현재 신자가 소수인 데서 분명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신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소유였다고(요17:6) 말씀하시고 조금 후에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하십니다(요17:9,요15:19 참조). 그러므로 전세계가 그 창조주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이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 자체는 그 예정된 대로 자멸하게 버려두십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이시지만, 아버지와 함께 선택권을 주장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하십니다(요13:18). 어디서 택하셨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귀절에서 “세상에서”라고 대답하십니다(요15:19). 그러나 제자들을 아버지께 맡기시는 기도에서 그는 세상을 제외시키십니다(요17:9). 우리는 바로 이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하신 자를 아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인류 가운데서 특별한 일부분 곧 그 덕의 성질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에 의해서 구별되는 일부의 사람들을 암시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선택의 창시자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아무도 자기의 노력이나 근면에 의해서 탁월한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를 “마귀”라고 부르시면서도 자신이 택하신 자라고 하십니다(요6:70). 이것은 그의 사도직에 관해서만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자주 말하는 것과 같이(예컨대 갈1:16,엡3:7), 사도직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명백히 증거해주는 거울이지만, 그 자체에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는 사도직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보다 더 나쁠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자신의 몸에 접붙이신 사람은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요10:28). 그 이유는 그들을 보존하시는 것이 그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만유보다 크신”(요10:29)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그가 다른 곳에서, “아버지여...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요17:11,12)라고 하신 말씀은 오용되기는 하지만 모호한 점은 없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임의의 선택으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만드신다. 이 일의 본질적인 원인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시는 은밀한 뜻으로 만족하시기 때문입니다.


8항.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교부들의(특히 어거스틴) 생각

  그러나 암브로시우스와 오리겐과 제롬은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자기의 은혜를 선용하리라고 예견하신 대로 사람들 사이에 은혜를 나눠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거스틴도 오랫동안 이 견해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잘 알게 된 후에는 이 생각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강경하게 반박했습니다. 사실, 그는 철회한 후에,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이 오류를 고집하는 것을 비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도가 이 궤변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그는 아직 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한 다음에,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라는(롬9:14)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시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예견하신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과 긍휼을 피난처로 삼았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선택 이전의 모든 공로를 일체 배제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립하는 하나님의 예지를 변호하는 사람들의 이론은 여기서 확실히 무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창세 이전에 선택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하게 되리라고 예견하셨기 때문이요, 우리를 선하게 만드시려고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요15:16) 말씀하시는 분은, 선한 것을 미리 보셨다는 말씀을 전연 하시지 않는다. 만일 그가 우리를 택하신 것이 우리가 선하게 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이라면, 그는 또한 우리가 그를 택하리란 것과 그 결과도 예견하셨을 것이다.” 교부들의 권위에 의지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은 어거스틴의 증거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자기가 다른 교부들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이 점으로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명쾌한 증명으로 이런 중상의 허위성을 밝혔습니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긍휼히 여기시는 자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불경건한 자를 경건하게 만드셨을 것이다. 그러나 불러 주시고자 하는 사람을 부르시며, 원하시는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신다.” 만일 내가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여 한 책을 만들려고 했다면, 그가 한 말 이외에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곧 증명할 수 있을 것이지만, 장황한 말로 독자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부들이 침묵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관심을 돌려 보기로 합시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바울은 행위를 고려할 것을 제의함으로써 한 마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 바울은 여전히 곤란한 논의를 계속했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기 때문이 아니었겠습니? 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께는 건망증이라는 허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간단명료하게,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따라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출33:19) 하신 말씀이 문제를 결정합니다. 이것은 마치 그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가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고, 그 밖에 아무 이유도 없다”라고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