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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48)_프린트물_2025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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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10-20 16:08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48)

[ 제3권 제23장 1항 – 제23장 4항 ]


    성경본문: 로마서 9:20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3장 이 교리를 겨낭한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들에 대한 반박


(유기는 선택에 동반되며, 하나님의 뜻으로 하시는 일이다, 1-3항)

1항. 선택은 있어도 유기는 없는가

  그런데 인간의 오성은 이런 말들을 들을 때에, 그 교만을 억제할 수 없어, 전투 나팔이나 들은 듯이 함부로 날뛰며 소동을 일으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으려는 듯이 선택을 용인하면서도 누군가 정죄받는 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무지하고 유치한 짓입니다. 버림과 대조되지 않으면 선택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따로 구별하신다고 말하면서, 선택만이 소수에게 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우연히 또는 자기의 노력으로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짓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예정하신 기업에서 그들을 제외하고자 하시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천사들까지도 찬양하는 하나님의 불가해한 계획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칠 때에, 그 말씀을 듣고도 제재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은 용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자비가 하나님의 손과 뜻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퍅하게 만드는 것도 그의 손과 뜻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롬9:14 이하). 또 바울은 내가 말한 사람들과는 달라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서 거짓 구실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진흙이 토기장이와 언쟁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경고할 뿐입니다(롬9:20). 그런데 하나님께 정죄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마15:13)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이 말씀의 뜻은 분명히,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농장에 거룩한 나무로서 심어주시지 않은 사람들은 멸망을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 말씀은 유기의 표가 아니라고 한다면, 아무리 분명한 일이라도 그들에게 증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논란을 그치지 않는다면, 건전한 믿음은 바울의 충고로 만족해야 합니. 즉 그는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롬9:22-23) 하나님과 싸울 까닭이 없다고 합니다. 독자들은 바울이 모든 수군거리는 중상의 기회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권능에 대한 궁극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데 주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지력을 삼켜버리는 깊은 판단을 우리의 결정에 예속시키려고 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나님께서는 그 관대하게 용인하시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배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할까 해서 그들에 대한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이라고 무가치한 대답을 합니다. 이것은 “멸하기로 준비된”(롬9:22)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심하기를 기다리면서 참으신다고 바울이 생각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권능과 인내가 결합될 때, 하나님은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능으로 주관하신다고 이 귀절을 바르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또 다음과 같이 첨가합니다. 진노의 그릇들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되었다”고 하며,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들을 예비하셨다”고(롬9:23) 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동시에, 멸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여,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른 표현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앞에 있는 문구의 가혹한 점을 완화한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멸하기로 준비된 일을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이외의 어떤 것에 옮긴다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짓입니다. 이 점은 바로 앞에 있는 문맥에서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셨다고(롬9:17) 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롬9:18).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강퍅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적어도 나는 어거스틴이 가르친 것을 지지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이리를 양으로 만드실 때에,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극복할 만한 더 강력한 은혜로 그들을 개조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완고한 자들을 회심시키시지 않는 것은 더욱 강력한 은혜를 나타내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반대론: 선택 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 2-3항)

2. 하나님의 뜻이 의의 표준이다

  경건하고 온건한 사람들과 자기가 사람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발언들만으로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악독한 개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내뿜는 독은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우리는 필요한 대로 그 하나하나에 대답하려 합니다. 미련한 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난을 들으셔야 하는 듯이 여러 가지로 항의합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고 그를 노엽게 한 일도 없는데, 무슨 권리로 그들에 대해서 노하시는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멸망에 내어주신다는 것은 재판장의 합법적인 선고라기보다 폭군의 변덕과 같다”고 의문을 갖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공과와는 별도로 하나님의 결정만으로 영원한 죽음에 예정된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쟁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생각이 경건한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다면, 한 가지 점만 고려하더라도 이런 생각을 충분히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호기심만으로 하나님의 뜻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은 심히 악한 짓이라는 점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또 그러해야 마땅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에 어떤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보다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은 그 먼저 있는 것에 지배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일은 그가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무엇이든지 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왜 그것을 원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은 어떤 것을 찾으려는 것이며, 그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의 경솔한 생각을 억제해야 합니다. 없는 것을 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있는 것까지 발견하지 못하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곰곰이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효과적인 제지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저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의 대담한 태도에 대해서는, 주님 자신이 우리의 도움도 받음 없이 그의 의로 충분히 자기 변호를 하실 것입니다. 즉 그들의 양심에서 모든 궤변과 구실을 빼앗고 그들의 유죄를 선언하시고 정죄하실 것입니다. 또 우리는 “절대적 권력”이라는 허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개념이므로 우리에게는 당연히 가증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법인 무법한 신을 상상하지 않습니다. 플라톤의 말과 같이, 정욕에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무 허물도 없을 뿐 아니라, 완전성의 최고 표준이며 모든 법의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답변하실 의무가 있다는 생각과 또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서 판단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허용된 범위를 넘으려고 할 때에는 시편에 있는 말씀 곧 죽을 인생이 하나님을 판단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승리자가 되시리라는 경고의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시51:4).


3항. 하나님께서는 버림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 공정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심으로써 원수들을 억제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태연하게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무기로 주십니다. 만일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사망의 심판을 받을 일을 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어떤 사람들을 사망에 예정하셨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대답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본성에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시려고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빚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로 더럽혀졌으므로 하나님께는 극히 가증할 뿐입니다. 이것은 폭군적인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공의의 입장에서 가장 공평하게 평가한 결과일 것입니다. 주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시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본성의 상태에 의해서 그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불공평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나오게 하여, 그들이 나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가 그들을 묶어 영원한 재난에 넘겼다고 해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쟁론하게 해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신다면, 하나님의 이 변호 방법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항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 전부가 썩은 덩어리에서 생겨났다면, 당연히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들의 본성이 자연히 자기들을 사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그들은 싫든 좋든 간에 느끼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으로 사망에 예정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정하시다고 비난하지 못할 것입니! 항의하는 그들의 심사가 얼마나 패악한가는 그들이 정죄의 원인을 고의로 은폐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들은 스스로 정죄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을 정당화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정죄를 내리시는 당사자라고 내가 백 번 말할지라도 - 이것은 옳은 말이다 - 그들은 자기들의 양심에 새겨져 자꾸만 눈에 띄는 죄책을 신속하게 씻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힐문을 받지 않는다, 4-7항)

4항. 하나님의 결정은 그의 공의에도 숨겨져 있다

  그들은 다시 다음과 같이 항의합니다. 즉 지금 그들의 정죄의 원인이라고 하는 그 부패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이 부패 속에서 멸망할 때에, 그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타락하여 불행에 빠지고 그 후손들까지 끌어넣은 그 불행의 벌을 치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피조물들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속이는 이는 공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인류가 지금 빠져 있는 이 비참한 상태에 아담의 모든 후손이 빠진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일이라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합니다. 또 우리는 결국 항상 하나님의 뜻의 단독 결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과, 그 결정의 이유는 하나님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비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결론은 여기서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그들은 그러한 대답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참으로 변호되지 않으며 우리가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궤변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는 힘이 있으며, 그 힘을 막을 수 없다고 하는데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과는 전연 다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하라고 할 때보다 더 강력한 이유를 말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어떻게 불의를 용인하실 수 있습니까?(창18:25 참조).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일이라면, 하나님은 본성에 따라 의를 사랑하시며 불의를 미워하십니다. 따라서 사도는 자기의 주장이 곤란을 당한 것같이 도피하는 구실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표준으로 측량하거나 사람의 약한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것임을 밝힙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판단에는 심히 깊은 기초가 있어서(롬11:33), 사람의 마음이 그 깊이를 알려고 하면 완전히 삼켜버려지고 말 것이라는 것까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떤 법으로 판단하려 하며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때는 그 일을 비난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미한 짓인가를 가르칩니다. 비록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만,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는 미련한 자들과 범법하는 자들에게 각각 그 삯을 주시느니라”(잠26:10, 제네바 성경 참조). 솔로몬은 여기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과 죄인들에게 그의 영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결정에는 그들에 대한 벌이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이성이라고 하는 극히 약한 척도로 무한자를 측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서운 정신 착란에 빠진 자들입니다! 바울은 고결한 지조를 지키는 천사들을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라고 부릅니다(딤전5:21). 만일 그들의 변함없는 충성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른 천사들의 반역은 그들이 버림을 당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사실에 대한 원인은 그들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버리심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회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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