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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강해(150)_프린트물_2025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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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12-08 23:40

본문

기독교강요강해(150)

[ 제3권 제23장 8항 – 제23장 11항 ]


    성경본문: 로마서 11:32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3장 이 교리를 겨낭한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들에 대한 반박


(아담의 타락과 버림받은 자들의 유기는 하나님이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결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이를 공의로 하셨다, 8-11항)

8항.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은 서로 다르지 않다

  여기서 그들은 뜻과 허락은 서로 다르다는 것에 의지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악한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 때문이지, 그것을 뜻하시기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는 것을 뜻하시지 않았다면, “허락”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만 하고 아무것도 뜻하시지 않았는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의 영장이 어떤 상태에 있으리란 것을 원하고 확정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하나님의 뜻은 사물의 필연성이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필연코 발생하는데 이는 그가 예견하신 일들이 참으로 발생하는 것과 같다고 서슴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펠라기우스주의자나 마니교도나 재세례파나 에피큐로스파는(우리의 상대는 이 네 파이다) 자기들과 악인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강압을 받는다고 하여 필연성에 항의하지만 그들은 이 문제에 적용될 만한 논법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예정이 하나님의 비밀의, 그러나 홈 없는 공의를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들이 이 상태에 예정될 만하다는 것은 확실하므로, 그들이 예정에 의해서 당하는 멸망이 정당하다는 것도 그것에 못지 않게 확실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존하되, 그 원인과 기회는 그들 자신 안에 있습니다. 첫 사람이 타락한 것은 주께서 그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충분히 나타나리라고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화제에 오를 때는 그의 공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찬양할 만한 것은 모두 반드시 정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한 대로 넘어지지만, 자기의 허물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습니다(창1:31).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한다고 하는 그 악은 어디서 왔습니까? 창조에서 왔다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나온 것에 대해서 시인하시는 도장을 이미 찍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자신의 악한 의도에 의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순결한 천성을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그의 타락에 의해서 모든 후손을 자기와 함께 멸망으로 끌어넣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 가까운 인류의 부패한 본성에서 정죄에 대한 명백한 원인을 보아야 하며, 감추어진, 전연 알 수 없는 원인을 하나님의 예정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을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복종시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며, 그 지혜의 수많은 비밀 앞에 굴복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무식한 것이 유식한 것이며, 변태적인 지식욕은 일종의 정신 이상입니다.


9항. 둘째 반대론에 대한 반박을 요약함

  내가 아직 이 사악한 구실을 침묵시킬 만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혹 있을 것입니다. 나는 불경건한 사람들의 불만을 완전히 막을 만한 증거를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것은 모든 반대론의 이유와 구실을 배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악한 자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용서를 받을만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자기들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이 필연성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자기들에게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당연히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멸망하도록 예정했다고 그들 자신이 불평하는 그 하나님의 결정에는 그 자체의 공정성이 있어서,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아주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받는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 내리는 벌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들이 정죄받은 원인을 찾기 위해서 감추어진 성역인 하나님의 계획으로 시선을 돌리고, 정죄의 진정한 원천인 자기들의 부패한 본성은 못 본 체하는 것은 패악한 행동이라고 우리는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막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하여 증거하십니다. 사람은 현재 당하고 있는 재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재난이 생기는 근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순결하게 창조하신 상태에서 부패하고 불순하고 패악한 상태로 타락했다는 것이 그가 멸망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10항. 세째 반대론: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이 편파적이라는 견해가 된다

  하나님의 예정을 반대하는 자들은 세째 어리석은 이론으로 예정을 중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의 상속자로서 받아주시는 사람들이 보편적인 멸망에서 면제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된 일이라고 우리가 주장하기 때문에, 반대론자들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시는 것인데 성경은 각처에서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들은 또 성경에 모순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에는 공로에 대한 고려가 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뜻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사람”(person)이란 말은 사람(ma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 보통 호감, 품위, 권위 등의 인상을 주거나, 또는 미움, 경멸, 치욕 등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은 예컨대 재산, 권력, 가문, 지위, 조국, 육체적인 미 등등이며(신10:17 참조), 또 빈곤, 곤궁, 비열, 사악, 치욕 등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가르칩니다(행10:34,롬2:11,갈2:6 참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을 구별하시지 않으며(갈 3:28),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 편을 받아들이고 다른 편을 물리치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도 하나님의 판단에는 재산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을 선언할 때에(약2:5),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심에 있어서 자유인이나 노예를 차별하시지 않는다고 합니다(골3:25,엡6: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로를 전연 고려하시지 않고, 다만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어떤 사람들은 자녀로 택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버리시며 정죄하신다고 우리가 말할 때에, 아무도 이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욱 만족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로가 다르지 않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을 버리시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택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하는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그들이 대답한다면 (또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고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선대하시는 이유를 자신의 선하심에서 찾으신다고 추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은 물리치시고 다른 사람은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한 사람만을 고려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자유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른 귀절에서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사람의 외모에 매이지 않습니다.


11항.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같은 태도로 예정하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편파적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고 사악한 비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보시면 모든 사람을 꼭같이 벌하실 것이며, 결백하다고 보시면 그 엄격한 심판을 모든 사람에게서 철회하셔야 한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지 말든지, 그렇지 않으면 긍휼을 베푸시고자 할 때에 그의 심판을 일체 포기하셔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함께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죄책이 공통적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몇 사람을 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벌을 주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공평한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 옳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이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베푸시는 능력을 빼앗으려는 것이거나, 베푸시는 것을 용인하더라도, 적어도 심판을 전적으로 포기하셔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의 말이 여기에 가장 합당합니다. “첫 사람으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정죄를 받았으므로...그 중에서 귀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진 그릇은 그 자신의 의의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다. 그러나 다른 그릇이 천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은(롬9:21 참조) 이유를 탐구할 문제가 아니고 심판에 돌릴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시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벌을 주시지만 부르시는 사람들에게는 받을 이유가 없는 은혜를 분배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비난도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마치 돈을 빌려 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빚을 탕감해주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빚을 받아낼 권리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자비하시므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으며, 공정한 심판자이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지는 않는다.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주심으로써 그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나타내실 수 있다....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것이 무엇임을 나타내실 수 있다.” 바울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갈 3:22)라고 기록할 때에,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빚진 분이 아니시라는 말을 첨가하여,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롬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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