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53)_프린트물_2026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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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3-03 12:21본문
기독교강요강해(153)
[ 제3권 제24장 4항 – 제24장 6항 ]
성경본문: 로마서 8:33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4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4항.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는 바른 방법과 그른 방법
선택이 우리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믿음, 즉 복음에 대한 믿음에 선택의 힘을 의존시키는 것은 잘못이므로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에 가장 좋은 순서를 따르려면 선택을 확실히 증명하는 표징들 즉 부수적인 표징들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릇된 곳에서 선택을 탐구하겠다는 악한 소원을 일으킵니다. 내가 “그릇된 곳에서 탐구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 불과한 자가 하나님의 지혜의 깊은 내부로 침입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고의 영원에까지 침투해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자기에게 대한 어떤 결정이 있었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은 밑이 없는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져 그것에 삼키우고 말 것입니다. 그는 풀려날 수 없는 무수한 올무에 걸리며, 볼 수 없는 암흑 속에 묻혀버릴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높은 데까지 올라가려고 할 때에, 어리석은 그의 이해력이 무서운 파멸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유혹은 우리의 거의 전부가 다른 어느 유혹보다도 가장 많이 빠지기 쉽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치명적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면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옵니까? 내가 선택되었다는 어떤 계시가 있습니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은 드뭅니다. 한 번 이런 생각을 마음에 가지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견딜 수 없는 고민으로 불행에 빠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생각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맙니다. 이런 경험은 이런 사람들이 예정에 대해서 얼마나 비루한 공상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양심을 점령하여 동요를 일으키며, 하나님과의 평화와 평온을 잃게 만드는 오류가 사람의 마음을 침범하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파선을 면하려면,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바위를 피해야 합니다. 여기 부딪치고서 멸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예정에 대한 논의를 험한 바다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고의로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만 않는다면 그 바다를 건너는 뱃길은 안전하고 평온하며 심지어 상쾌하다고도 하겠습니다. 자기들의 선택을 더욱 확신하려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그의 말씀과 별도로 탐구하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심연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선택을 바르고 합당하게 검토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위로의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탐구 방법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출발점과 종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매일 받는 은혜가 저 은밀한 선택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느끼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사야서에서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사 25: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일종의 증거품같이 쓰셔서, 우리가 허락되는 범위내에서 그의 계획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알도록 우리에게 확인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증거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가를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베르나르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말을 했습니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 말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결정은 움직이지 않는다. 주의 평화의 목적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위에 여전히 있어서 움직이지 않으며, 그들의 악을 용서하고 그들의 선행을 갚아준다. 그래서 주의 자비의 놀라운 방법으로 선한 일뿐만 아니라 악한 일까지도 서로 협력하여 선한 결과를 나타낸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8:33). 나의 의를 위해서는 하나님만 내 편에 계시면 충분하다. 나는 그에게만 죄를 지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가하시지 않기로 결정하신 모든 일은 마치 그것이 없었던 것과 같다.” 그리고 조금 뒤에, “오, 진정한 안식처로다! ‘거할 곳’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도다. 오, 하나님을 뵙는 곳, 성내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나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산란한 하나님이 아니라, 인자하고 다정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의 감화를 체험하는 곳이로다! 이 환상은 공포심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위로를 준다. 불안한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고 도리어 진정시킨다. 우리의 감각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고 도리어 안정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느낀다.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평화로운 것을 제공하신다. 그리고 안식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곧 우리들의 진정한 안식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5항.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하며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자비하심과 인자하신 마음을 찾으려면,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오직 그리스도 위에 머무십니다(마3:17 참조). 우리가 구원과 생명과 천국의 영생을 구하려면,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곳이 없습니다. 그만이 생명의 샘이며, 구원의 닻이며, 천국의 상속자이십니다. 그런데 선택의 목적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로 삼아 주신 우리가 그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선택의 목적을 아무리 이모저모로 생각해보아도, 결국은 이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은 그들 자체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합니다(엡1:4).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실 수 없었다면, 따라서 그들을 미리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자들로 만드시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그의 나라를 상속하는 영예를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선택되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선택의 보증을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도 선택의 보증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 거울이며, 우리가 이렇게 보는 데는 아무런 자기 기만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으로 영원 전부터 정하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기로 예정하셨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려고 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계 21:27 참조) 너무나 분명하고도 확고한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의 확실한 친교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즉, 자신과 자신의 모든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복음 선포를 통해서 증거하셨습니다(롬8:32). 우리는 그로 옷입으며(롬13:14), 그에게까지 이르러(엡4:15), 그가 살아 계시므로 우리도 살게 하려 하신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자주 반복되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셔서(롬8:32,요3:15 참조)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게 하셨다는(요 3:16) 것입니다. “이를 믿는 자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합니다(요5:24).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시며(요6:35), 이 떡을 먹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요6:51,58). 다시 말하거니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모두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로 인정하시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인정되는 이상의 무엇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초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라면, 그의 안에서 이미 얻은 것, 그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그의 밖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미친 짓입니까?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이며, 불변의 진리이며, 견고한 계획이 시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우리가 구하는 아버지의 뜻과 조금이라도 다를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께서는 그 아버지의 뜻의 처음부터 영원까지를 우리에게 충실히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도 이 생각을 항상 가져야 합니다. 선택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를 촉진시키지만,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오 하나님, 만일 저를 선택하셨으면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조건을 붙여 흥정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만족하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겠는지를 다른 데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기록된 바른 생각을 바르게 이용할 줄을 안다면, 이 지혜는 우리를 여러 가지 함정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일정한 한도 내에 두어야 할 일을 이리저리 끌어내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호 하에서 선택된 자들의 견인은 확실하다: 반대론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귀절들을 해석함, 6-11항)
6항.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선택이 불변, 영속하다는 확신을 주신다
우리의 선택의 확고성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리의 확신을 든든하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아는 지식으로 비춰주시고 교회의 품에 안겨 주신 사람들을, 또한 그가 돌보시며 보호하신다고 합니다. 그가 받아 주시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셨고, 영생을 얻도록 보호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모든 사람을 그의 보호 하에 두셨다고 선언하십니다(요6:37,39, 17:6, 12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는지를 알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맡기셨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 위에 세우신 유일한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보호 하에 받아들이셨는지를 아직도 의심한다면, 이 의심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기꺼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며,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의 양떼에 넣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요10:3).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는 인자하신 마음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고 우리를 맞이하러 오십니다. 그는 우리를 그의 양떼에 넣으시고 그의 우리 안에 두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의 상태에 대한 불안이 몰래 숨어듭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선택된 자들이 부르심을 받는다고 가르치며(롬8:30) 그리스도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마22:14). 참으로 바울은 과도한 자신을 가지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또한 그대는 하나님의 백성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11:20)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찍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이라(롬11:21-23)고 합니다. 끝으로 견인을 첨가하지 않으면 부르심과 믿음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압니다. 또 견인은 모든 사람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런 불안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확실히 미래에 적용될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마찬가지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7-29).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마15:13)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 뿌리를 박은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서 뽑히지 않으리라는 뜻을 역으로 암시하십니다. 요한의 말은 이 뜻과 부합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2:19). 그리고 바울이 생명과 죽음, 현재와 미래의 일을 이겼노라고 당당하게 발언을 하는 이유도(롬8:38)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랑은 견인의 은사를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확실히 이 생각을 모든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한다. 다른 곳에서 도 같은 생각을 말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다윗도 믿음이 약해진 때 이와 같은 도우심을 의지했습니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138: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과 같이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는 것은(눅22:32)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일을 보아서 우리는 그들의 경건이 변함없기를 기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거부를 당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된 사람들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고 추론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 일에서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까? 우리는 이미 그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앞으로 영원히 안전하리란 것을 확신하라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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