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강해(159)_프린트물_2026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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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9-09 05:20본문
기독교강요강해(159)
[ 제3권 제25장 6항 – 제25장 7항 ]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5:1
기독교강요(존 칼빈, 생명의말씀사)
제3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25장 최후의 부활
6항. 육신은 부활하고 영혼은 불멸한다
그뿐 아니라, 호기심이 병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두 가지 망상을 제기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전인이 죽는 것같이,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의 불멸을 인정하면서, 영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생각 중에서 처음 것에 대해서는 인간의 창조를 논할 때에 다소간 언급한 것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독자들에게 이 생각이 얼마나 동물적인 오류인가를 다시 한번 경고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영을 이 무상한 인생에서만 몸을 살려 주는 덧없는 호흡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성령의 전을 말살하며, 결국 우리에게서 신성이 가장 빛나며 영생 불사의 증거가 분명히 보이는 이 영에게서 불멸이라는 은사를 빼앗습니다. 그 결과, 몸의 처지가 영혼의 처지보다 좋고 더 탁월하게 됩니다.
성경의 교훈은 훨씬 다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집에 비유하고, 우리는 죽을 때에 이 집을 떠나며, 이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장막”을 “벗을” 때가 왔다고 말했습니다(벧후1:14). 그러나 바울은 일반 신자들에 대해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하고(고후5:1), 이어서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5:6),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갈망한다고 합니다(고후5:8). 만일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 있지 않는다면,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는 “의인의 영들”이 모인 곳에 우리도 모였다고 함으로써(히12:23) 모든 의심을 일축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저 거룩한 조상들과의 교제에 들어갔으며, 이 조상들은 비록 몸은 죽었으나, 우리와 같이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들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몸을 벗은 영혼이 그 본질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복된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도적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눅23:43)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분명한 증거를 믿고, 죽을 때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슴지 않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거나(눅23:46), 또는 스데반을 본받아 믿는 자들의 신실하신 “목자와 감독”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벧전2:25) 그리스도께 맡겨야 합니다(행 7:59).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등의 문제로 공연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경솔한 짓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이 위로를 얻도록 낙원으로 영접하신다고 하였고(요12:32 참조), 한편에서는 버림받은 자들이 그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상의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숨기신 일을 어떤 선생이 우리에게 나타낼 것입니까? 장소에 대해 묻는 것도 미련하고 무익한 일입니다. 영혼은 몸과 같은 차원을 가진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영이 모인 복받은 곳을 “아브라함의 품”(눅16:22)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친 후에 믿는 자들의 공통된 조상의 영접을 받으며, 그의 믿음의 결실에 우리도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을 넉넉히 보증합니다. 동시에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라고 명령하며, 영광의 면류관을 그 때까지 연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한계, 즉 경건한 자들의 영혼은 그 어려운 싸움을 마친 후에 약속된 영광을 즐길 때를 기쁘게 기다리던 복된 안식으로 들어가며, 모든 일은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보류된다는 한계를 지키고 만족해야 합니다. 버림받은 자들의 운명은 확실히 유다서에 있는 마귀들의 운명과 같습니다. 즉, 마귀들은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혀져 있을 것입니다(유6절).
7항. 현세에서 입고 있던 몸으로 부활함
어떤 사람들은 영혼은 현재 입고 있는 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다른 몸을 받는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이것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극심한 오류 중의 하나입니다. 마니교도들은 이 생각에 대해서 불결한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무가치한 이유를 말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하늘 생활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 영혼은 불결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그들의 생각은 “죄로 더러워진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도 깨끗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은 마귀가 만든 것이므로 본성이 불결하다고 한 그들의 망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지금 우리 안에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부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우선 바울은 신자들에게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라고(고후7:1) 명령하므로,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가 다...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고후5:10)한 판단은 이것의 결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 말과 부합하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영과 혼과 아울러 그들의 몸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까지 완전하게 지켜주시기를 기원합니다(살전5:23).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으로 성별하신 몸이(고전 3:16) 부활의 소망이 없이 썩어버린다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일일 것입니다. 신자들의 몸은 또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가요(고전6:15). 하나님께서는 몸의 각 부분을 그에게 성별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까? 사람의 혀가 그를 찬양하며,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며(딤전2:8),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시지 않습니까?(롬12:1). 사람의 이 부분에 대해서 하늘 심판자께서 이렇게까지 빛나는 영예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시는데, 죽을 인생이 그것을 회복될 소망이 없는 흙으로 돌린다는 것은 얼마나 미친 짓입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영혼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영혼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주를 섬기라고 우리에게 충고한 바울은(고전6:20),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이라고 확실히 주장한 그것이 영원한 부패의 운명을 당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 성경은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이 몸이 부활하리란 것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가르칩니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합니다(고전15:53). 만일 하나님께서 새로운 몸을 만드신다면, 이 성질의 변화는 어디서 생길 것입니까? 만일 성경이 우리가 새로와져야 한다고 했다면 이 모호한 표현이 그들에게 너절한 반대를 할 구실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를 가리키면서 이 육체가 썩지 않으리라고 약속하므로, 새 몸이 생긴다는 것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부인합니. “참으로, 그가 자기의 손에 피부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이상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터툴리안은 말합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라고 말하고,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한 사실을(롬14:11) 잔소리꾼들은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사49:18)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라는(사45:23,롬14:11)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그의 글을 받을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각각 일생동안 한 일을 고해야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만일 새 몸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이런 말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니엘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단12:2) 한 말에는 모호한 점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네 가지 원소에서 새로운 재료를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또 여기에 명백한 이유가 나타납니다. 죽음이 인간의 타락에서 생겨난 우발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회복은 그 죽기 시작한 육체에 속합니다. 바울이 부활을 주장했을 때 아덴 사람들이 웃은 것을 보면(행17:32), 그가 어떤 전도를 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이 웃었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만일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몸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두려워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다른 말씀도 이와 꼭 같이 분명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우리는 영혼들이 무덤 속에서 쉬고 있으며, 거기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할 것입니까? 오히려 그의 명령이 있을 때 몸이 그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 아닙니까?
그뿐 아니라, 우리가 새 몸을 입게 된다면 머리와 지체들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새 몸을 입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그는 말씀하셨습니다(요2:19). 그는 전에 입으셨던 죽을 몸을 다시 입으셨습니다. 속죄 제물로 바친 몸이 소멸되고 새로운 몸이 대치되었다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다고(고전15:12 이하) 사도가 선포한 이 연관성을 우리는 고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사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 점은 현저한 예를 보아서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 때에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무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마27:52-53 참조). 이 일이 우리가 대망하는 부활의 전조 또는 보증인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이미 에녹과 엘리야에게 있었던 일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터툴리안은 그들을 “부활의 후보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그들이 몸과 영혼의 부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영접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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