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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모리스 로버츠 목사씀 (진리의 깃발 2019년 9월호)

 

인간과 나라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때때로 그들을 편만한 혼돈과 곤란 가운데 맡기는 것이다.  완전한 세상에서의 인생은 이상적으로 단순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것이며 그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어김없이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공급은 언제는 섭리적으로 요구를 만족한다. 사람들은 결코 부족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자신들의 최우선이며 유일한 선으로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일들을 돌봐주실 것이며, 모든 상황에서 그들의 요구와 기대치를 판단하셔서 그들의 평안과 편리와 한계를 위해 세밀한 부분까지 재단해 주시는 것이다. 마치 현명하고 자상한 부모는 자녀들의 필요를 미리 예측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영양분과 모든 것을 준비하여 그들의 안전과 이득과 즐거움이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벤트들을 계획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1차적인 낙원에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혼돈스럽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지금 어떠한가 이 세계는 하나님의 자비와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고 있지 않으며 오직 우리의 깊은 죄악의 상태만을 반영하고 있다.

죄악이 모든 지상의 것들을 혼돈스럽게 만들었다. 모든 인간의 사업은 노동과 땀과 눈물로 빚어져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로 놀라지 않는다.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아담에게 첫 타락의 시간에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언하셨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 3:19) 역사의 증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됨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전1:8) 모든 삶이 고통 속에 구부러져있고 모든 길이 비틀려 있으며 모든 장미꽃에 가시가 돋아나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운명의 저주라고 말하지만 사도들은 그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다 (롬 8장20절)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죄악들이 더할 수록 강도를 더해 간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극에 이르기 전에는 미친 삶의 경로를 바꾸기를 거부하는 반역적인 어두움에 처해있다. 섭리의 심판은 최후의 심판처럼 완벽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미스테리하거나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심판은 대부분 인간들의 삶의 행태에 비례할 것이다. 사회가 더 죄악될 수록 하나님의 심판은 더 가혹해 질 것이다. 이는 어느정도 하나님께서 사회 속의 인간을 다루시는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 규칙에 대한 많은 예외는 다름 아닌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는 완전한 심판을 상기시키는 경우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이생에서조차 인간과 나라들의 행위에 비례하여 축복과 저주를 내리신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사회가 더 악해져 갈수록 더욱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시켜 이 땅에 진노를 쏟아 놓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능자께서는 한가한 방관자가 아니시고 매일 마다 모든 일을 감찰하셔서 공공의 정책과 개인들의 태도가 악한 길로 바뀌는 지 옳은 길로 나가는지를 주지하시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심판이 마지막때로 미루어졌다고 함부로 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도 그는 인간들의 죄를 다루시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나시는 것이다. 때때로 그는 전통의 화살을 꺼내어 인간들과 나라들을 벌하시며 때때로 활을 잠시 내려놓아 죄인들이 회개하고 자비를 구할 때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만일 혼돈과 당혹이 우리가 생각하기에 죄악된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우리는 오늘 이시간 하나님의 손이 분명히 우리위에 펼쳐졌음을(사 9:21,17,21; 10:4) 고백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혼돈과 당혹스러움은 어느 곳에서나 관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왕궁의 보좌부터 빈자의 가정 내에서도, 왕자부터 고위 성직자에게까지. 인생의 모든 군상에 걸쳐 불확실성과 고통의 고뇌가 두루 펼쳐져 있다. 우리의 직업과 환율은 우리의 도덕성처럼 불안하게 널뛰고 있다. 우리를 인도하는 리더들은 앞날에 대한 어떠한 비젼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자주 보인다. 너무나도 자주 그들의 사적인 삶은 너무나도 많은 흠결을 가지고 있다. 현대 세계는 약삭바르고 똑똑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은 그들보다 더 현명하시다는 점이며 우리가 허영과 헛된 일에 분주할 때 방향을 돌리심으로써 우리를 좌절에 빠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 어느 곳에도 다음과 같은 말은 적용돼기 어렵다. '지혜와 지식은 네 때의 안전대이며 구원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주를 경외함이 그 재물이라'(사 33:6)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리셨고 혼돈의 맨틀 위로 우리를 던지셨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는 자들이라면 왜 이러한 최근의 혼돈이 이리 편만해 졌는지 이유와 방법을 알 것이다. 사람들은 공의의 원칙에 대해서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 사회는 더욱 더 해악과 불행으로 치닫고 있지만 성경과 섭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매번 벽에 또 하나의 금이 생겨날 때마다 그 이유를 기초부터 조사하기 보다는 단순히 '담을 쌓을 때 회칠을 한다'(겔 13장 10절) 말하며 자위하고 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많은 혼돈이 일어날 때 우리는 먼저 삶의 전반을 압도하고 있는 철학을 의문시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들은 이조차도 가장 최후에나 선택할 법한 일이다. 일어난 트러블들은 우리의 죄와는 상관없다는 뻔뻔한 자세가 모든 면에서 유지되고 있다. 번영은 언제나 코너 앞에 놓여 있다. 내일은 혹은 그 다음 날에 국가 채무는 해결될 것이고, 모든 자들을 위한 일자리는 생겨날 것이며 모든 시민들을 위한 평안과 풍족은 곧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이 텅빈 긍정주의는 다름 아닌 우리의 비극적인 혼돈의 한 현상일 뿐이다. 수 많은 질문들이 답변을 요구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싸늘한 적막만인 우리를 반겨줄 뿐이다. 내일의 세계에서 새로와진 점들이 우리의 수많은 민중들을 더욱 근면하게 하고, 법을 사랑하게 하며, 이웃을 생각하고 현명하고 도덕적이게 만들 수 있을까? 무신론 사회를 다스리는 철학에서 발견하게될 새로운 변화들은 미래 사회를 더 행복하고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까?
솔직하며 진지한 나의 대답은 - 이 대답을 듣기에 준비된 자들에게 -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사회는 난기류처럼 더욱 소용돌이 칠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과 종교의 전망이 이미 파산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가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젼에 대한 망상으로 인한 영적인 무지의 안개를 거둬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고 있다. 고상한 새로운 무엇인가가 이 사회의 도덕적 시궁창에서 우리를 건져낼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처방이 이 좌초된 국가의 배를 구해내는 데 필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옛적의 계시된 진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들의 시대에 이 진리의 발견을 소중히 여겼지만 오랫동안 이 사실은 죄악적으로 무시되고 조롱받아 왔다.

 

이 새대에 대한 필요는 간단히 말하면, 이 사회가 설교자의 강단을 통해 새롭게 되고 개혁되어져야 한다. 설교 강단에 올라가고자 하는 자들은 이 사회를 충분한 분량의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들어올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고할 특별한 소명을 받았음을 주지해야할 것이다. 안개와 연무가 사회 위에 편만하게 퍼져있을 때 그들을 물리칠 유일한 힘은 순수한 복음적 가르침으로 부터 나오는 온화한 햇빛뿐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이 인류가 처한 문제에 대한 치유는 정치적인 휴머니즘이나 사회과학이 아니다. 그들은 완전히 실패했다.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된 성경적인 가르침에 대한 오래된 커리큘럼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3가지 과목으로 분류 할 수 있다. 인간의 전적 타락,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속과 성령 하나님에 의한 성화이다. 만약 독자들이 이 병든 사회를 향한 치유책이 이것뿐이냐고 실망감을 느낄 지도 모르나 바로 이 방법은 과거 역사를 통해 수 백번도 더 검증된 사도적인 메세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뒤집어 엎으시면서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세상을 축복하셨다. (롬1:16) 만일 사회가 앞에 언급된 타락과 혼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과거와 같은 방법을 써야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이란 이름으로 주신 축복만이 우리를 복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있다. 설교자들은 스스로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진정한 복음의 메세지는 이미 끊긴지 오래이다. 설교자들의 대부분은 청중에게 죄와 상실한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인간의 불의와 불경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옥으로 향하는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구세주로 언급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거듭남은 인간의 구원에 필요불가결한 조건으로 설교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오래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매우 귀하고 소수이다. 복음적인 강단들이 미끄러운 혼돈으로 빠져들고 무감각이 일상화되고 있는 지금, 설교자들은 엔터테인먼트에 가까운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트럼펫을 소리를 그쳤다. 천국과 지옥은 모든 설교자들의 양심에서 실제하는 현실로 인식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너무 공손해져서 죄인들이 교회 와서 마지막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각성시키는 설교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멸망해가는 비참한 세계에 대한 전망은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어 성령의 계몽하심과 설교자들을 찾아오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교회에서 더이상 어리석은 판토마임 연기를 제공해서는 안되는 시대이다. 우리는 더 이상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의심스러운 종교적인 럭셔리들에 심취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역할은 너무나 분명하다 - 의를 전하고 인간의 양심과 이성에 맞서서 하나님의 진리를 밝혀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눅 3:7)는 평범한 메세지를 가급적 많은 귀에 전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부차적인 문제들이다. 부차적인 문제들은 앞서 놓는다면 불타는 로마를 보며 바이올린을 켜는 꼴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주변의 세상 기준정도에서 사는 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혼돈 그 이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예언자는 더 높이 올라가 정상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현대적인 관용주의와 불경한 엔터테인먼트가 판을 치는 지금, 우리는 그것들을 피하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이 시대의 소명은 그리스도에 가까이 살며 더 가까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아 복음이 모든 자에게 능력적으로 전파되는 시기가 올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사회의 모든 구석 구석에 심판적인 어두움을 깊게 깔아 놓으셨다.  이 혼돈의 안개는 어느 때보다 두껍다. 하지만 우리의 영광스러운 확신은 여전히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민중의 눈을 가리고 있는 이 어두움을 제거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 분은 이 일을 모든 인류를 위해 하시는데 오직 한가지 방법만을 선택하신다. 설교자들이 오래된 복음을 신실하게 전파하여 '성령이 하늘로부터 강림'(벧전 1:!2)하는 그 방법 뿐이다.

  • 이성일 2019.10.03 11:34
    우리 교회에도 한 번 오셨기에 익숙한 모리스 로버츠 목사님이 오랜만에 진리의 깃발지에 기고하셨습니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이 시대를 향한 예언적인 메세지의 날카로움은 변하지 않으시네요. 혼란이 가득한 요즈음 이 글을 읽으며 우리 교회에 주시는 사명을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 우국향 2019.10.03 13:13

    이시대의 문제점과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하는 글이네요. .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정신 ㅡ이기적이고, 개인적이며,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는것이 진리라는 생각, 상처받지 않으려 상처를 주는 모습들ㅡ을 어느정도 알고는 있다고 생각됩니다..다만 비판하는 사람은 많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부족한것 또한 현실이기에 날카롭게 비판하고 냉소적으로 시대를 바라보기 보다는 간절한 소망속에서 기도하는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필요한 때인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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